요리하는 남자는 무적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앞치마를 두른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숟가락만 얹던 50대 아저씨였지만,
이제는 가족을 위해 직접 칼을 잡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국물을 책임지는 시간이
제 인생의 가장 든든한 낙이 되었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치이고 어깨가 무거워도,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를 피워 올리며 식구들을 기다릴 때만큼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오늘은 이런 무적의 기운을 담아,
찬바람이 쌩하고 불 때 우리네 속을 확 풀어주는 동태찌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눠보려 합니다.
5월 중순인데도 올 해는 밤이면 늦가을을 느끼게 하는
찬기운에 동태찌개가 생각이 나서 한번 만들어 봅니다.
꽁꽁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주던 추억의 맛, 동태찌개의 유래

동태는 우리 민족에게 참 고마운 생선입니다.
명태를 꽁꽁 얼린 것이 동태인데,
예부터 버릴 것 하나 없는 효자 식재료로 사랑받아 왔지요.
특히 겨울철 단백질 공급원으로 이만한 게 없었습니다.
만화 '식객'을 보면 생태찌개 대목이 나오는데, 거
기서 무릎을 탁 쳤던 비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동태의 애(간)를 된장에 살살 으깨어 넣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생선 특유의 기름진 향과 고소함이
국물 전체에 퍼지면서 맛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제 어릴 적 동태찌개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의 시린 손끝과 맞닿아 있습니다.
시장에서 신문지에 돌돌 말린 꽁꽁 얼어붙은 동태를 사 오시면,
어머니는 그걸 수돗물에 녹여가며 정성껏 손질하셨죠.
국물 속에 들어있는 꼬불꼬불한 모양의 이리(수컷의 정소)를 보며
"이게 고기보다 맛있는 거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많
은 분이 알 모양의 고니(암컷의 생식소)와
뇌처럼 생긴 이리를 헷갈려 하시는데,
저는 이 쫄깃하고 고소한 이리를 참 좋아했습니다.
눈보라가 치던 겨울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양은 냄비에 담긴 동태찌개를 나눠 먹던 그 시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 한 숟가락에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던
그 따뜻한 풍경이 가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시절 어머니의 마음으로 주방에 서서 찌개를 끓입니다.
마트 장바구니에 담긴 시행착오, 좋은 재료가 맛의 절반입니다
동태찌개를 맛있게 끓이려면 일단 마트 장보기부터 잘해야 합니다.
제가 초보 시절에 겪었던 실수 중 하나가 그냥 '세일' 문구만 보고 덥석 집어온 동태였어요.
집에 와서 녹여보니 살이 다 퍼지고 비린내가 진동하더라고요.
동태를 고를 때는 눈이 맑고 몸통에 윤기가 흐르는 녀석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장이 신선한지 꼭 확인하세요.
특히 '애'라고 부르는 간이 싱싱해야 국물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습니다.
한번은 마트 아저씨가 "오늘 고니가 아주 좋다"며 알을 추천해주시길래 듬뿍 사 왔는데,
알고 보니 저는 이리를 더 좋아한다는 걸 깜빡했지 뭡니까.
식구들도 각자 취향이 다르더라고요. 아내는 알찬 고니를 좋아하고,
저는 고소한 이리를 좋아하니 이제는 장 볼 때 비율을 딱 맞춰서 사 옵니다.
그리고 무는 바람이 들지 않은 단단한 녀석으로,
쑥갓은 잎이 싱싱한 걸로 골라야 국물이 시원하고 향긋합니다.
요리는 재료를 고르는 그 설레는 발걸음부터 시작된다는 걸,
수많은 장보기 실패를 통해 배웠습니다.
"이걸 샀더니 이렇더라" 하는 저만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일수록
제 요리 실력도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50대 아빠의 투박하지만 확실한 실전 레시피
1.동태 손질과 '애' 으깨기

동태는 지느러미를 깔끔하게 잘라내고
속의 검은 막을 깨끗이 씻어내야 쓴맛이 안 납니다.
여기서 저만의 특급 팁!
식객의 가르침대로 신선한 동태 애(간)를 따로 빼서
된장 한 큰술과 함께 그릇에서 잘 으깨주세요.
나중에 국물에 넣으면 그 풍미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비린 맛은 잡아주고 고소함은 배가 되거든요.
2.육수 내기와 무 깔기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면 좋겠지만,
바쁠 땐 그냥 쌀뜨물도 훌륭합니다.
냄비 바닥에 무를 큼직하게 썰어 깔고 육수를 붓습니다.
무가 반쯤 투명해질 때까지 먼저 끓여주세요.
무에서 시원한 맛이 충분히 우러나야 국물이 가볍지 않습니다.
3.양념장 투하와 보글보글 끓이기
으깨놓은 된장 섞인 '애'와 고춧가루, 다진 마늘, 국간장을 넣은 양념장을 풉니다.
국물이 끓어오르면 손질한 동태와 고니, 이리를 아낌없이 넣으세요.
이때 너무 자주 뒤적거리면 동태 살이 다 부서지니 주의해야 합니다.
거품은 숟가락으로 살살 걷어내야 국물이 깔끔해집니다.
4.마무리 채소 올리기
마지막으로 대파와 청양고추를 썰어 넣고,
불을 끄기 직전에 쑥갓과 두부를 올립니다.
쑥갓 향이 국물에 살짝 배어들 때 식탁으로 옮기면 끝입니다.
저는 냄비째 식탁에 올리는 걸 좋아합니다. 그
래야 다 먹을 때까지 온기가 유지되니까요.
마지막까지 맛있게 즐기는 팁과 남은 음식 보관법

동태찌개는 갓 끓였을 때도 맛있지만,
사실 그다음 날 다시 데워 먹으면 국물이 더 진국이 됩니다.
플레이팅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커다란 뚝배기나 양은 냄비에 담아내면 분위기가 확 살지요.
궁합 음식으로는 달걀말이가 최고입니다.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 한 입 먹고 부드러운 달걀말이 한 점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습니다.
고니와 이리는 간장 고추냉이 소스에 살짝 찍어 드셔 보세요.
그 고소함이 두 배가 됩니다.
남은 동태찌개는 반드시 완전히 식힌 후에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 보관해야 합니다.
생선 요리는 상하기 쉬우니 다음 날에는 꼭 다 드시는 게 좋고요.
만약 양이 너무 많이 남았다면 살만 따로 발라내고 국물과 함께 소분해서 냉동했다가,
나중에 수제비 반죽이나 칼국수 면을 넣고 끓여 먹으면 그게 또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주방을 지키는 아빠의 정성이 담긴 이 한 그릇이
우리 가족의 내일을 만드는 무적의 에너지가 되길 바랍니다.